부르시는 날까지

금요일 저녁,비오는 날임에도 우리 가족은 다같이 나가 과일을 사서 즐겁게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콧노래도 흥겨운 그 때, 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경자가 암일지 모른다. 상태가 나쁘다더라.”
흥얼거리던 듀엣 FAITH의 '찬양하라’가 순간 머리속에서 엉키며 앞에 아지랭이가 피었습니다.
언니가 '받아들여라’뭐 그런 얘기를 한 것 같긴 한데 더이상 어떤 생각도 안났습니다.
좋아하던 찬양하라의 가사가 한 줄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왜 그러냐는 가족의 물음에 아무런 설명없이 말했습니다.
“경자가 암일지 모른대. 상태가 나쁘대.”
최대한 나를 지탱하려 애를 써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힘을 주며 저녁을 지어먹고
TV앞에 앉아서 그날이 마지막이라는 연속극도 보았으나 그건 이미 내가 아니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질문과 항변을 하나님께 해보았습니다.
내가 아니고 동생이라 다행한 일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건 나도 안되고 동생도 언니도 모두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왜
그동안 가족에게 보여준 내 알량한 믿음의 자존심때문이라도 울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눈물이 솟아나는 걸 보이지 않으려고 콜드크림을 얼굴에 잔뜩 묻혀 눈에 들어 간 것처럼하고는
소리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로 바꿔 놓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없으면 당장 낼부터 우리 가족은 엉겨버립니다. 아침마다 깨워야 일어나고
갖고가는 수저도 일일이 넣어 줘야하며, 우리 딸은 아무거나 퍽퍽 잘 먹지도 않고 고2라 수능을 지금 잘 대비해야하고
과외 할 거 다시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 아들 너무 어려 아직 내가 해줘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남편은 이제 교회예배 겨우 한번 드렸을 뿐인데 제가 없으면 누가 끌어 주며, 요즘 일이 잘 되어서 한참 꿈에 부풀었는데 누구와 미래를 같이 의논하며
기회가 다시 왔다고 화장실에 들어가 웃고 나온다 한들 나만큼 우리 애들을 잘 거둘 사람을 만날까요?
학교에서도 NEIS파동으로 성적처리를 시작도 못하고 강사 구하기도 힘든 요즘이라 올 사람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고 그보다 아직 갈 준비 못했습니다.`

이제껏 믿은게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천국시민이라고,가는 곳이 본향이라고 말한 자가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리고 버려라, 받아들여라 하셨습니다.

버려야 할 것
그것의 제일 먼저는 내자신 그리고 가족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천기누설에 해당하는 특급 비밀인데 몇 년전에 나는 가족을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근무하는 학교에서 오후에 화재가 나고 난 다행히 저학년 아이들이 하교한 터라 아이들 걱정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를 보니 시커먼 연기가 거세게 피어 오르고 아아,3층에는 아직 고학년 아이들이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난 이미 나왔는데 …
그러나 만약 저 아이들과 그곳에 있던 교사가 다 죽었는데 나만 살아났다면 그 무슨 수치일까? 그래도 사는 게 낫지 않나?
아니야. 그건 살아나도 죽은 거만 못할거야.
난 그 때 내 가족을 버렸습니다. 엄마없이 남을 우리 아이들을 수없이 부르고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리며 다시 연기 자욱한 3층으로 올라가 아이들과 함께입을 막고 내려오는 순간 여러대의 소방차가 왔습니다.

오래 눈물이 흐르고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께 맡기고 버리며 살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깨닫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아직 시간 주심이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생도 나같은 마음이 될 것을, 담대한 마음이 될 것을 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나보다 더 깊은 믿음을 실천하고 사는 동생이었으니까요.

토요일 오후에 희주아빠가 왜 동생에게 전화 안해보냐고 물었습니다.
으응, 사실은 무서워서
그렇게 담대해지려 해도 받아 들일 사실은 무섭기만 해서 비장하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준비했던 모든 말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이없게도 저녁먹었냐이딴거나 물었는데 동생의 말이
`나 양성이래, 의사가 잘못 보았대.

하나님의 해결은 명쾌했습니다.
나 이 기회에 나의 유언장도 쓰라면 쓸 준비를 하고 았었는데 아직도 먼 나의 믿음을 주님이 모르실리 없어서 깨달으라고, 더 잘 살다오라고
이런 기회를 주신 것만 같았습니다.

밤 9시도 더 넘어서 우리는 안심을 하고 서울로 달려가 다시 살아 난 동생 가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은 사랑이란 모습으로 함께 하심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12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 왔지만 오랫만에 세자매가 세동서가 모인것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다음날은 아주 기쁘고 감격어린 마음으로 여전도회 첫번 헌신예배를 드렸습니다.

난 어린 아이처럼 주님이 너무 좋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입니다.
FAITH의 찬양하라 가사는 이러합니다.
…소고를 치며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

부르시는 그 날까지 감사하며 찬양하며,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