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하나

대부분 학교에 온 화분의 운명은 이렇습니다.
3월 초 아직 냉기가 성성한 교실에서 창가 한 쪽,햇빛이 가장 잘 비치이는 곳에 일단 폼좋게
자리 잡고 사랑과 찬사를 받습니다.
그러다 소위 말하는 학급 환경 심사가 끝나고 나면
교실에 온 혜택으로 뭘 배워보기는 커녕 차츰 관심 밖으로 밀리고
급기야는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하고 고사하는가 하면
여름방학까지 겨우 살아난 화분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쓸쓸한 최후를 맞지요.
그 중에 용케 겨울까지 버텨온 화분들을 발견한 나는 이것만은 정말 잘 기르고 싶어서
다음 새 학년 교실까지 끌고 왔습니다.
난들은 정말 잘 자라 주어서 초 여름이 되니 제법 싱그러움도 느끼기에 충분하여
당번 어린이가 혹 잊고 물을 주지 않은 날에는 내가 물 떠다가 부어주며 애지중지 했습니다.
난 사이에 난인지 풀인지 모르는 것이 눈에 띄었으나 그들도 한 화분의 생명 이려니 하고
같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연휴를 보내고 교실에 들어서던 어느날 아침, 아이들이 몰려와 말합니다.
화분이 변했다고.
와, 진짜 변해 있었습니다.
주인공 난 사이로 수북하게 몸을 솟구치듯이 펴진 풀, 아니 잡초들.
그 사이에 호랑이가 새끼쳐도 될 만큼 그렇게 퍼질 줄이야.
나는 부아가 치밀고 분하고 그동안 그 풀들의 위장술에 속이 다 쓰렸습니다.
멋진 난 화분으로 가꾸려던 나의 뒤통수를 치며 이리도 당당하게 퍼지더란 말이냐?
난 즉시 응징에 나섰지요.
내 너희를 뿌리채 뽑아 내치리라.
그러나 생각보다 그 뿌리는 훨씬 깊어 한 방울 주기도 아까운 물을 흠뻑 적시고 꽃삽까지 동원해서야
겨우 뽑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화분 어딘가에 남아 있을 잡초의 뿌리를 생각하니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믈론 나였습니다.
처음에 눈에 안 보인 것도 아닌데 그냥 괜찮겠거니 지나치다 애꿎은 난들만 피해를 보게 한 셈이지요.
믿음에 있어서도 이럴것입니다.
애초에 선과 악은 같이 할 수가 없고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하며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전서 [1 Thessalonians] 5장 22절
고 말씀하셨지요.

우리 교실 창가에는 난 화분이 다시 한가롭게 자라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저 깊숙한 화분속의 잡초 뿌리가 은근히 두렵습니다.
그 것처럼 내 자신 속에도 있을 분노, 미움, 화냄, 질투 등 등 악의 모양이 자랄까봐
오늘도 피 흘리신 주를 내 안에 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