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다가

교장 선생님 퇴임 기념 여행을 다녀 온 후 사진이 교실로 전송 되었습니다.
요즘 사진은 잘 나온거 골라 볼 겨를 없이 이렇게 전송되면 끝이더군요.
사진에 별 기대가 없이 그냥 보고 저장만 했습니다.
동학년 교사들이 모여 사진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나왔던데 자기만 엉망이라는 사람,
가슴이 작은 것이 그대로 나와서 아쉬운 사람,
더 나이들게 나왔다는 사람.
같은 사진을 놓고 반응이 여러가지 입니다.
나는 사진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솔직이 요즘은 사진 보기가 예전처럼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그 사진 나도 보면서 이제부터 슬림작전 세워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하는 말들이 잘 나왔다나요.
듣고 있다 아, 하고 사진의 법칙이란 말이 절로 생각났습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사진은 모두 잘 나온거고 자신의 사진은 모두 못 나왔다는.
비로소 알겠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진을 본다 하면서 정작 보는 것은 자신이 정한 기대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진 찍으려고 선글라스를 일부러 끼고 찍은 사람은 그 효과가 기대만 못하여 못 나온 것처럼,
가슴 컴플렉스를 가진 사람 눈에는 가슴만 보이고,
나이 먹는 것을 느껴가는 사람에겐 주름만 확대되어 보이는 법.
그 날 우리는 흔히 맛 볼 수 없는 꽃밥을 맛있게 먹었고
여러 허브 향에 취해도 보았으며
잘 정돈된 오솔길에 즐거웠던 산책도 했으나 그런 생각 같은 것들이 그 사진에 나올 리가 없지요.
나 또한 하필 여행 간 그 곳이 결혼하고 맨 처음 차도 없이 가서 고생 하였던 바로 그 자리 였음에도
그 때의 감격은 생각지도 못하고 내 모습만 바라보다니.
어차피 사진만 덮으면 그 날 입었던 옷조차 검정인지 빨강인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며
립스틱 짙게 발랐는지,
머리 염색을 했는지 관심조차 없어질 것을 무얼 입을까 얼마나 생각했던지요.
그게 내가 아닌데도.
결국 남는 건 현실 속의 나 자신.
사라질 겉 사람을 위해, 타인의 눈 때문에 낭비 해 버린 그 시간들이 소리지르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감사를 느낍니다.
이런 나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나를
감찰하시며 자녀 삼아 주신 그리스도 예수로 성령의 옷을, 사랑을 입습니다.
이제 길은 확연합니다.
이 땅에 남아야 할 것은 외모도, 경치도, 사진도 아니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여!
내 모습, 내 죄 기억지 않으시고 속 사람을 감찰하시며
성령의 뜻대로 친히 간구 하시는 그 사랑에 오늘 내 가슴은 눈물 흠뻑 젖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