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

연휴를 앞둔 금요일 저녁에 후배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감기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콧물 훌쩍이며 영안실에 들어섰습니다.
입구에서 부터 훌쩍이니 누가 보면 엄청 애도 하는 것처럼 보일 것도 같습니다.
평소에 가보면 꽉 찬 듯 보이던 빈소들이 그날따라 을씨년스럽게 보입니다.
추석을 앞두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이 부르신 것 같지 않아 여기저기 비어 있었습니다.
막 입관식을 끝낸 후배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울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부모님을 보낸 나도 다시 그 날의 아픔이 살아 나는 듯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소파에 누워 계시다가 주무시려니 했는데 그 길로 가셨답니다.
준비가 없었던 이별이라 더욱 애통하다고 했습니다.
온통 인생이 사실은 떠나갈 준비 기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늘 내 눈에 익은 십자가가 도통 보이지 않습니다.
혹 신앙이 있었냐는 내 조심스런 물음에 고인은 아무 종교도 가지지 못하고
평생을 어디로 다녀볼까 하다가 떠나셨답니다.
그러나 친지 중에 수녀가 있어서 의식을 카톨릭 식으로 하겠노라고 합니다.
살아 온 것은 내 방식, 끝맺음이라도 카톨릭 식으로?
비로소 생면부지의 고인에 대해 깊이 슬픔이 밀려 왔습니다.
윤리적으로는 바르게 사셨을지 모르나 신앙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영접 없이 떠난 고인에게
진심으로 애석해하며 애도 했습니다.
이제와서 카톨릭 식 아니라 기독교 식으로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음을 못 들어서 였을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여겨서 였을까요?
아무런 찬송도 기도도 보혈의 십자가도 없는 그 자리에서 나는 냉기와 허전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내가 할 일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나중에 기독교 식으로 해도 천국 문 앞에서 주께서 내 너를 모른다 하면 어쩝니까?
부르시기 전에 늘 준비하며 살기를.
때가 이르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이 주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전하고 간구해야 함이 내 할 일임이
전해 옵니다.
이 작은 자도 복음 전하며 살기를
늘 그리스도로 기쁨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하는 하루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