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도는 세상

[br] 어느 여름날, 억울한 심정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간 밤의 불면으로 하여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였습니다.
어떤 교양 없는 사람이 남 다 자는 새벽까지 세탁기를 돌려서 잠 못잤다고 툴툴 거렸습니다.
간 밤에 12시가 지나 시작된 세탁기 소리.
잠을 청하고 또 청할수록 세탁기 소리는 더욱 커져 갔고
나는 점점 말똥 말똥해지는 눈을 굴리며 누워서 우리 집보다 높은 층에 사는, 심증이 가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생각해 냈습니다.
'7층 아주머니? 그럴 만도 하지.
지난 번에 위층 세탁기에서 우리 집으로 물 쏟아질 때에도 관리실에서 확인 할 때까지 오리발이었으니까.
그 옆 지은 엄마? 그럴리 없지. 하긴 요즘은 자주 나다니더니 늦게 세탁기 돌리는지 모르지.
8층 새로 이사 온 집? 그럴 수 있어. 저 번에 내 차 못 나가게 다른 곳에 공간이 있는 데도 막아 놓았었거든.
806호? 아니야. 평소에 얼마나 조신하고 교양 았는데.
9층? 거긴 누가 살더라? 아하, 전에 희수 아빠가 아침에 타이어 펑크 난지도 모르고 출발 하려는거 알려 주었어도
고마워 하기는 커녕 아무 반응도 없던 아줌마.
10층 반장 아주머니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내 머리에 들어 온 모든 주민들은 하나 같이 내가 쏘는 의심의 화살을 맞아야 했습니다.
다음에 또 소리나면 내 이를 당장 관리 사무소에 알리든지 아니면 내가 직접 나서 응징 하리라 마음 먹었는데
또 세탁기가 돌았습니다.
그 소리에 자려던 내 머리가 다시 돌려는데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납니다.
아니 이게 웬 일?
그 소리는 세탁기가 아니라 방 안의 선풍기가 내는 소리였습니다.
한 여름을 빼고는 사철 추운 나와 한 겨울을 빼고는 사철 더운 남편이 한 방을 쓰자니
나는 선풍기 바람이 싫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서 선풍기 소리가 귀에 익지 않아 알지 못하였으나
그 소리는 분명 수면풍이라는 제목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선풍기는 누가 세탁기 소리라고 난리를 치던지 말던지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고
남편은 선풍기 바람 쐬며 잘도 잤던 것 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혼자 난리 친 내 눈 앞에
얼마 전 8월 기도원 다녀 오던 날 타 보았던 블랙 홀이 나타났습니다.
조명 찬란한 원이 회전 하는 사이에 놓여진 좁은 다리를 통과 하는 놀이 기구 였는데 2m 겨우 넘을 그 먼? 거리를
난 얼마나 비비적 거리고 비틀 거렸던지요.
내 눈 앞에서 내가 또 ‘비비적 비틀’ 거리고 있었습니다.
내리고 나서 보면 그저 회전하는 원 사이에 놓인 좁은 다리에 불과한 것을.
‘그냥 세탁기가 도는 구나’ 했어야 했거나
적어도 오밤중에 세탁하는 마음을 십분의 일이라도 이해 했어야 했습니다.
정말 그랬어야 했습니다.
옥동자의 '잘난척 하기는 적어도…'하는 소리도 귀에서 울리고.
내가 한 짓을 알지 못하는 아파트 여러 착한 사람을 어찌 대하리 무안스럽고.
그러고 보니 상처 받고, 슬퍼하고, 마음에 들고 안들고, 예쁘고 밉다는 모든 생각들이 사실은
내가 지어낸 내가 만드는 허상이 분명 합니다.
선풍기가 세탁기가 되듯
보통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마음을 쓰며 살아가나 싶습니다.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하셨건만. 정죄치 말라 하셨건만…
한참을 괴로워 하는데 원래 인간에게는 아무 바램이 없으셨다 하셨습니다.
이렇듯 내가 괴로워 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하게 변함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부족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택하셨고 그 사랑으로 내가 살아감을 다시 일깨워 주셨습니다.
허물 많은 나를 자녀라 하신 그 사랑에 겨워
꺼이꺼이 눈물로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 그 거룩한 산성 앞에
나는 두 손 높이 듭니다.
여전히 세탁기가 돌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