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를 잊다

내게 고치고 싶은 몇 가지를 말하라고 하면 그 중의 하나는 바로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담스런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께 불평도 해 보았었고
더군다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국어책에 나오는 ·적도의 성자 슈바이처‘는 그 당시 나를 얼마나 곤혹스럽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예나지나 품행방정하고 성적 우수하여 아이들에게 대놓고 놀림을 당한 것 같지는 않으나 어쨌거나 그 단원이 끝나도록 나 혼자 어찌나 부담스러웠던지.
그리하여 이름값이라도 해얄 것 같아 이것저것 조사해 보고
슈바이처에 대하여 일종의 경외감과 나도 언젠가는 적도 비슷한 곳이라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슈바이처에 대한 내 생각은 참 많이도 바뀌고
능력과 봉사 그리고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보는 예수와 나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기에.
그리고 그 이름 뒤에 붙은 두 글자에 감히 혼자서 찜찜해 했습니다.

올해 우리 학교에 어찌 보면 켄터키 할아버지 같기도 산타 같기도 한 원어민 교사가 왔습니다.
이름을 듣고 나는 그 이름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도 이름에 대한 이야기와 개명하는 부분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름의 의미에 대하여 관심 많은 내가 놓칠 리가 있나요.
Stephen. 스데반
많은 순교자들이 있어 오늘날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지만
스데반이란 이름은 언제나 내게 구체적인 믿음의 길을 보여주는
주춧돌만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용서와 사랑을 알았던 그 장엄 순교는 언제나 내 가슴을 칩니다.
끝까지 예수를 품고 기쁨으로 마지막을 마친 스데반이
의사, 음악가, 연주가 신학자, 봉사자로 생을 마친 적도의 성자보다
더 위대합니다.
그래서 난 ‘적도의 성자 슈바이처’를 잊었습니다
참, 그 원어민 교사나 나나 이름은 흔하기는 하지만 이름값을 하며 살아야 할텐데
이름처럼 사는 것.
아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로 따르는 것
그게 나의 기도요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