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가는 날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짐을 정리하려니 갑자기 이 모두가 은혜로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내집이려니 하고 14년 살던 집을 이사합니다
희수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아기라 이모 등에 업혀 와서 중학생활도 끝나가는 세월
그간 기쁜 일만 있었겠습니까마는 어찌된 일인지 나빴던 것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버려야 할 것, 간직해야 할 것의 경계들이 아주 분명해지고
결국 물건이건 감정이건 소용이 되지 못할 것들은 애초에 버렸어야 했음을 다시금 알게 됩니다
미처 다버리지 못한 것들을 버리고 정리하며
엊그제까지도 엘리베이터를 출근시간에 층마다 눌러 놓아 만나면 혼내주려 별렀던 꼬마를 이젠 느긋한 마음으로 황당하지만 귀여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새로 이사가는 집의 문을 여는 것이 어찌나 어색함인지
새로움보다 또다시 거쳐야 할 여러 고단한 절차에
여기건 저기건 이 땅 우리가 사는 이 곳이 내 집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느낍니다
누구의 집이냐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산다는 것 자체가 그저 이사가는 연습인것을.
SG워너비의 노래처럼 살다가 살다가 진짜 내가 갈 곳
거기가 영원한 내 집이겠지요
복잡한 절차도 요구도 없는 그저 내 주 따라 가면 주마고 약속한 그 곳.
그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겠지요
지금까지 그리고 이 땅 떠나는 그날까지 지낼 모두의 삶은 주의 크신 은혜 안에 있습니다